청호웹진 5월호

문화로 읽는 불교 3

공양, 시주, 그리고 보시

- 주수완 / 우석대학교 교수 -

page 일본 나라 호류지(法隆寺)의 식당건물(왼쪽). 사찰에서 하는 식사는 공양이라고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주로 공양간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기부하는 행위에 대해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공양, 시주, 보시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절에서 밥먹는 것을 ‘공양’이라고 한다. 공양은 누군가를 떠받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불교에서는 특히 스님들께 음식을 드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절에서는 내가 밥을 먹는 것도 공양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을까. 필자가 불교미술사를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은 초기에 절을 찾았을 때 “스님, 저는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는데, 법당에서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습니까?” 하고 여쭤보면 스님들은 마지못해 허락해 주시면서 늘상 내게 “근데 공양은 했는가?” 라고 물어보셨다.

공양의 원래 의미만 아는 나에게는 당연히 내가 부처님께 뭔가를 드리는 행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님께서 법당에서 사진을 찍기 전에 불전함에 돈이라도 넣고 사진을 찍으라는 말씀으로 알았다. 그래서 “아직 안 했습니다”라고 하면 “아직 공양할 수 있을테니, 가서 공양 먼저하고 사진을 찍으시게”라고 재차 강조하셔서 “아, 사진 찍기 전에 돈을 꼭 내야하는가보다”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공양간에 가면 식사를 할 수 있으니 식사 먼저하고 그리고 조사를 하라는 배려의 말씀이셨던 것이다. 마지못해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해주면서도 밥을 꼭 챙겨 먹이려는 스님들의 배려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감사한 것이었다.

page 공양의 원래 뜻은 부처님이나 스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었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에 소장된 부처님께 공양드리는
사람이 표현된 조각

공양의 원래 뜻은 부처님이나 스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었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에 소장된 부처님께 공양드리는 사람이 표현된 조각. 그런데 왜 내가 밥을 먹는 것인데 공양이라고 할까. 그런데 왜 내가 밥을 먹는 것인데 공양이라고 할까. 내가 나를 공양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불자가 스님이나 절에 재물을 희사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공양, 시주, 보시라는 말에는 비슷한 의미지만 다른 뜻이 담겨있다. 공양은 원래 스님께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에서는 종교수행자에게 밥을 제공하는 일이 가장 큰 공덕임을 앞서 말씀드린 바 있다. 이것은 한끼 식사에 해당하는 것이다.그런데 시주는 단지 한 스님에게 특정해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절이나 교단에 무엇인가를 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일 수도 있고, 절에서 스님들이 야간에 사용할 초나 기름일 수도 있고, 또 더 나아가 스님들이 거주할 집이나 땅을 드리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시주는 사전적 의미로는 ‘베푸는(施) 주인공(主)’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 자체가 무엇을 드리는 행위는 아니라고 보는 해석도 있으나, 오랜 기간 “절에 시주하다”는 의미가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그 속뜻을 보면 특정 스님이 아니라 교단에 기부한다는 뜻으로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page 장자 수닷타가 부처님께 절을 지어드리기 위해 제타태자의 땅(제타바나)을 황금으
로 사는 장면을 묘사한 인도 바르후트 탑의 부조. 시주의 가장 유명한 사례일 것이다.
수닷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보시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때로 ‘스님께 시주한다’는 표현도 있는데, 이것은 탁발하러 온 스님에게 한끼의 식사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절에서 쓰시라고 그 이상의 것을 내놓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틀린 표현은 아니다. 물론 현대사회에 와서는 탁발 자체가 없어지고 있고, 혹 스님이 탁발을 하신다고 해도 정말로 밥 한끼를 드리는 경우는 없이 돈을 드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양과 시주의 경계가 모호하기는 하다. 그러나 원래의 뜻은 스님 개인에게 드리는 것인가, 절이나 교단에 드리는 것인가에 따라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시가 있다. ‘크게 혹은 넓게(普) 베푼다(施)’는 의미인데, 이것은 시주보다 더 큰 차원이다. 즉, 절이나 교단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해 절에 시주하는 것이다.

자신이 불우이웃돕기를 하면 되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해야할지 잘 모를 때 기부하고 싶은 재물을 절에 기부하는 것이다. 즉, 보시는 그 재물을 절을 포함한 사회 전체를 위해 사용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다, 혹은 넓다는 뜻의 ‘보’자를 써서 보시라고 하는 것이다.

page 아쇼카왕은 빈민구제 사업을 많이 벌인 것으로도 유명한데,
사찰에 땅을 기부한 것도 빈민구제시설로서의 임무를 부여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아쇼카왕의 뜻은 그가 세운 석주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앞서 스님이 말씀하신 ‘공양’의 의미를 풀어볼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우리가 절에 가서 먹는 음식은 누군가의 보시를 통해 마련된 것이다. 그 누군가는 이러한 보시로 인해 자신에게 공덕이 쌓이길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음식들이 아무도 먹지 않아서 쌓여있다가 다 썩어버린다면, 비록 좋은 뜻으로 보시한 것이지만, 그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누군가 그 음식을 먹어줄 때 보시한 사람의 공덕이 완결된다. 따라서 내가 절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그 음식을 보시한 사람에게 공덕이 쌓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때 밥을 먹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먹으면서 밥을 보시한 사람이 공덕을 받도록 받드는 행위이기 때문에 공양이라 하는 것이다. 그 떠받듦, 즉 공양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비록 모르지만, 여하간 특정인이 그 음식을 공양했다는 가정하에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절에서 음식을 할 때의 올바른 마음가짐이란 “이 음식을 공양한 분의 공덕이 완결되어 큰 복덕이 돌아가기를 바랍니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과거에는 그런 의미에서 공양간을 마치 무료급식소처럼 운영했는데, 요즘은 점차 사찰 신도들에 한해 식사가 허용되는 곳으로 제한되는 곳이 늘어나는 것이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공짜음식을 먹으러 찾아오면 사찰로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조치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필요해서 오는 사람들 중심으로 배식이 이루어지면 좋을텐데,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도 공짜라면 일단 먹으러 오는 것이 문제 아닌 문제였던 셈이다. 그러나 최소한 사찰이나 신도들이나 보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고, 그것이 같은 사찰의 신도들에게만 아니라 사회에 쓰일 수 있도록 늘 신경을 쓰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더불어 사찰에서도 시주로 들어온 물품이라면 사찰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보시의 개념으로 들어온 물품은 비단 사찰만이 아니라 더 넓게 쓰이기 위한 용도로 기부받은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는 절이 고리대금 사업을 한다는 이유로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실은 이렇게 쌓인 재물로 마을 사람들의 보증도 서주고, 사업자금으로 빌려주기도 하고, 그냥 도와주기도 하면서 지금의 은행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생겼던 일이었을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재물을 무시한 적은 없었다. 늘 올바로 쓰이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