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5월호

음악의 전당 3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양대 산맥, 쇼팽 VS 리스트

- 김준희 / 인천대학교 교수 -

높은 수준의 음악성과 내면적 성숙함을 동시에 가진 당대의 두 거장

2015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팽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영웅 폴로네이즈>와 <협주곡 1번>을 찾는 애호가들이 많아지고, 2022년 반클라이번 콩쿨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에 의해 리스트의 <초절기교 에튀드 곡집>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프레데릭 쇼팽과 프란츠 리스트.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두 명의 작곡가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듣지 않는 사람도 쇼팽의 녹턴이나 왈츠의 한 부분은 흥얼거릴 정도로 쇼팽의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그 못지 않게 리스트의 곡들도 많은 곳에서 접할 수 있다. 낭만주의 시대는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베를리오즈, 바그너 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활동했다. 하지만 피아노 음악에 있어 독보적이었던 쇼팽과 리스트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page 프레데릭 쇼팽

쇼팽은 1810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귀족학교의 교장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인문학적 소양이 깊었던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학교의 정규과정을 거쳤다. 여덟 살 때 대중 앞에서 첫 연주를 할 만큼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전통적인 독일 스타일의 대위법을 공부했고,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20세 무렵 빈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지만 곧 프랑스 파리로 옮겨 데뷔무대를 가졌고, 큰 성공을 거둔 뒤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파리는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의 중심지였다. 쇼팽의 연주를 보고 싶어하는 청중들이 많았고, 그는 연주는 물론이고 부유층 자제의 개인 레슨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작품을 썼다.

리스트, 베를리오즈, 로시니, 벨리니 등을 비롯하여 발작, 들라크루와, 하이네 등 다양한 계통의 예술가들과도 친분을 쌓으며 음악적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쇼팽은 서양음악사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피아노에 헌신했던 작곡가이다. 단 두 개의 작품을 제외하고 200개에 이르는 모든 곡들이 전부 피아노 작품이다.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하여 소나타, 발라드, 스케르초 등 규모가 큰 작품부터 왈츠, 녹턴,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프렐류드, 에튀드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피아노 작품을 남겼다. 평생을 피아노를 위해 매진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는 오케스트라적인 색채나 실내악적인 모습보다는 피아노로 표현되는 독자적인 음색들로 가득하다.

page 피아노를 연주하는 쇼팽

그의 작품들은 다채로운 색채와 세련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연주법을 요구했다. 쇼팽의 작품을 연주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루바토(Rubato)’이다. 선율을 자유롭게 ‘밀당(밀고 당기는 것)’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데, 연주자가 재량에 따라서 연주하는 부분의 템포를 의도적으로 조금 빠르게 혹은 조금 느리게 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낭만시대의 연주법 중 빼놓을 수 없는 루바토는 특히 피아노 작품을 연주할 때 매우 흔하게 사용된다.

<좁은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쇼팽의 음악을 가리켜 “제안하고, 가정하고, 넌지시 암시하고, 유혹하고, 설득하나... 딱 잘라 말하는 일은 거의 없는 음악”이라고 했다. 쇼팽의 서정성과 낭만성을 가장 잘 나타낸 표현이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섬세하고 환상적인 피아노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변화무쌍한 음색과 감미로운 선율의 매력은 현대의 클래식 팬뿐만 아니라 폭넓은 계층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병약한 천재였던 그는 마요르카섬에서의 요양 생활을 거쳐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결같이 우아한 음색을 가졌던 프랑스제 피아노를 애용했다.

page 프란츠 리스트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는 피아노 음악에 있어서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누구보다 기교가 뛰어났던 그는 ‘리사이틀(recital)’이라는 피아노 독주회를 처음 열었던 연주자였다. 이전까지는 여러 명의 연주자가 음악회의 여러 부분을 담당했지만, 리스트는 한 시간 남짓한 음악회의 전부를 홀로 책임지는 대형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다. 또한 연주하는 모든 작품을 악보없이 외워서 무대에 올린 최초의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는 소년 시절에는 주목받는 신동으로, 청년 시절에는 유럽 각지에서 연주 여행을 하며 풍부한 음악성과 마법같은 기교로 전 유럽을 매료시켰다. 지칠줄 모르는 체력으로 연주와 작곡을 동시에 이어나간 그는 그야말로 수퍼스타였다. 리스트의 업적 중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재탄생’에 관한 것이다.

그는 가곡, 오케스트라곡, 오페라곡 등의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피아노로 편곡했다. 단순한 ‘편곡’보다는 ‘의역’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는 동시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모차르트, 벨리니, 베르디 등 오페라의 주요 선율을 피아노로 들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큰 장점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오페라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리스트가 피아노로 편곡한 오페라 작품들을 들으며 대리 만족할 수 있었다.

리스트는 30대 중반부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음악 활동의 반경을 넓혔고, 노년에는 젊은 시절의 화려한 행보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하급 사제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연주 활동도 줄이고, 무급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공개레슨(masterclass)을 통해 그의 음악을 널리 전수하고자 했다.

page 피아노를 연주하는 리스트

어머니의 나라 폴란드를 항상 그리워하던 쇼팽은 파리 생활을 하며 폴란드어를 거의 잊었다고 한다. 비록 여권에 있는 이름만 폴란드어였던 그였지만,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에튀드 <혁명> 등을 통해 모국에 대한 애정을 폴란드의 민족주의적 색채(Polish Nationalism)로 마음껏 표현했다. 헝가리 태생인 리스트 역시 빈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며 모국어 대신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주로 사용했지만, 헝가리 광시곡 등에서 특유의 집시 선율 등 모국의 음악적 소재들을 그의 작품 적재적소에 사용했다.

한 살 차이였던 쇼팽과 리스트는 1832년 쇼팽이 파리에서 데뷔할 무렵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쇼팽은 그의 파리 정착을 도운 리스트에게 <에튀드, Op.10>을 헌정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동시대의 연주가인 페르난디스 힐러와 함께 연주회를 열기도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고, 리스트는 쇼팽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조르주 상드를 소개하기도 했다. 쇼팽과 리스트 모두 악마의 기교를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환상적인 연주를 접하고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쇼팽의 피아노 음악은 내밀한 감성을 담고 있고, 종종 내성적이거나 우울하게 느껴진다. 반면에,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은 웅장함과 기술적인 탁월함을 내세우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은근하게 복잡한 테크닉들의 연속인 쇼팽의 작품들은 연주자로서의 쇼맨십과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리스트의 작품 못지않게 높은 수준의 음악성과 내면적 성숙을 요구한다.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더 없는 친숙함을, 피아니스트들에게는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숙제를 준 쇼팽과 리스트. 19세기 음악사에 있어 가장 돋보였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인 두 명의 거장에 대해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