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5월호

심리이야기3

자기탐구를 위한 화두(話頭)

- 김세곤 / 청호불교문화원 상임이사 -

page 서울 길상사 관음보살상

1. ‘메멘토 모리’는 자기탐구(자기발견)의 화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는 명언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연유와 관련이 있어서일까 정작 내가 누구인지 자문하면 할수록 어렵고 묘연하게만 느껴진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또 종국에는 '어디로 가는지'와 같은 의문은 참으로 근원적이며 궁극적인 물음이라 그 답을 찾기가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탄생이나 죽음(生死)과 같은 현상들은 때때로 우리를 마치 아득한 深海 속으로 데려다 놓기라도 하는 것만 같다. 특히 가까운 주변 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순간에는 생을 마감하고 있는 그 당사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내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더 강한 두려움과 강렬한 의문에 빠져들게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이며 나의 탄생 전에는 나는 어디에 있었고, 존재하게 되는지, 죽음 이후에도 현 세상은 여전히 지금처럼 존재하게 되는지 이 몸뚱이는 사라지겠지만 내 영혼만큼은 어떤 미지의 세계나 혹은 천국의 하늘나라로 흡사 여행이라도 떠나듯 어디론가 가는지 등등 이런 궁금증들을 불러일으키며 기대 반 불안 반으로 전생 또는 사후세계의 모습을 그려보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의문들은 평소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생각(질문)의 소재로 잘 삼으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마도 이런 유형의 자기물음들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욕구 충족(만족)과는 직접 연결되지도 않고 또 어떻게 그 해결의 길(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저런 세상의 온갖 잡다한 질문들에 대해서조차 옳든 그르든 척척 그 답을 알려주는 ‘인공지능 챗 GPT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예를 들면 '내가 누구인지'와 같은 질문들을 계속해서 던지며 스스로 그 답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걸까? (달리 표현하면 근본적으로 어려운 이런 질문들이 일상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과연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일상에서 ’知彼知己면 百戰百勝’이란 고사성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 구절 속에 함축된 의미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인간이 인간(자신이나 타인)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그래서 생긴 것이리라! 하지만 대게의 경우 평소에는 보통의 凡夫 들조차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 만큼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믿고 막연히 그렇게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진짜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파고들면 들수록 여간 만만한 질문이 아님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심도 있는 자기(마음) 탐구를 위해서는 난해하다고 해서 그런 질문들을 묵과할 수도 없고 또 비켜 갈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를 찾고자 하는, 즉 자기발견을 향한 지극한 몸부림 속에서 참 나(眞我)를 만날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철학적인 화두의 하나로 ‘메멘토 모리’라는 문구를 들 수 있다. ‘메멘토 모리’란 라틴말로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한마디 구절은 賢者나 哲人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깊은 사색과 통찰로 나아가게 하는 신비한 魔力을 지닌 듯하다. 사용 의미나 그 용처에 따라서는 다소 차이가 나겠지만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좌우명처럼 ‘죽음의 參究’는 우리 자신들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라틴말의 그 짧은 한 문장 속에 함의된 자기발견의 힘 또한 상당하다고 여겨진다.

다행스럽게 자기탐구를 촉진하고 자기발견이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많이 개발되었고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마침 이러한 연구주제와 연관성이 큰 전통적인 종교영역이나 철학 분야 외에도 최근에는 신경(뇌)과학의 영역에서까지 자아의식을 포함한 인간의식 경험 전반에 관한 연구들이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그 결과 뇌·몸·마음·환경과의 상호연관성을 一元的이고 통합적 관점에서 취급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연구추세는 몸(身), 감각 또는 느낌(受), 마음(心), 인식대상 또는 의식(法)의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불교 사념처 수행법의 기본원리와도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특히 사띠수행을 비롯한 위빠사나와 사마타 명상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은 더한층 증폭되고 있다. 이하에서는 나를 탐구하여 나를 발견하고 나의 실체와 그 근원을 깨쳐서 正覺을 얻도록 하자는 불교의 자기 탐구방법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2. 자기 탐구(자기관찰)와 간화선의 ‘이 뭣고’ 화두

page 명상하는 부처님

2. 자기 탐구(자기관찰)와 간화선의 ‘이 뭣고’ 화두

일본의 도겐(道元, 1200~1253) 이라는 유명한 선사는 ‘나를 공부하여 나를 잊는 것’이 불교 공부의 근본이라고 설파하였다. 이것은 불교에서의 ‘자기탐구와 그 공부’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力說하는 하나의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불교의 핵심교리인 三法印(3가지 진리의 도장),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곧 불교 공부의 핵심 要諦임을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잘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도겐 선사는 일본 조동종의 개산조이자 ‘正法眼藏’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불교에서의 무아(無我)의 중요성을 잘 피력한, 선사가 남긴 어록의 영어번역 원문을 이하에 그대로 인용해 둔다.

“To study Buddhism is to study the self. To study the self is to forget the self. To forget the self is to be awakened by all things. And this awakening continues endlessly.”

한편 김주환 교수의 경우도 『내면소통』(2023, 인플루엔설)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제법무아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알기 쉽고 상세하게 잘 해설하고 있다. 그에 따 르면 ‘제법무아는 나에 대해 인식하는 모든 것이 ‘아나타’(無我)라는 뜻이다.’라고 해석하면서 자신의 견해로는 무아(無我)보다는 비아(非我)가 좀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저 평범한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실제로 현실에서 자신의 몸을 갖고 내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단순히 ‘내가 없다(無我)’라든지 또는 ‘내가 아니다(非我)’라고 할 때 그런 무아의 의미를 정말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김 교수도 이런 의문점들을 감안했는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제법무아의 가르침 속에는 ‘인식주체로서의 나(배경자아, 진짜 나)’ 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여하튼 일반인에게는 좀처럼 이해가 쉽지 않은 그 어려운 諸法無我의 개념에 대해서 김 교수는 ‘불교전통의 명상법’을 잘 정리하여 소개하면서 간화선의 시심마(是甚麽), 즉 ‘이 뭣고’화두 또한 자기참조훈련과정의 핵심 근간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참조훈련과정이란 본인이 창안한 ‘마음 근력 훈련’을 말하는데 이 개념은 ‘행동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기관찰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자신을 바라보는 힘, 즉 자기관찰력을 ‘인식주체로서의 나’라는 의미에서 바르게 사용한다면 불교 사띠 명상법의 기본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간화선의 ‘이 뭣고’ 화두 또 한 자기탐구를 위한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끝으로 최근에는 신경(뇌)과학에서도 ‘나란 도대체 누구인가’ ‘자아의식’과 같은 주제를 실증적·임상적 차원에서 연구 검증한 결과물이 많이 보고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연구결과물의 거의 공통된 결론은 우리가 느끼는 감각을 비롯한 의식적 경험들은 어쩌면 모두 거짓(환각)이며 결국은 가상현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나’라고 느끼면서 그렇게 알고서 분명 그렇게 믿고 있는 여러분 자신 또한 과연 진정한 ‘나’일까요? 아닐까요?

불기 2567년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면서 ‘이 뭣고’ 화두를 깊이 參究 하여 참나를 발견해 가는 환희심을 느껴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