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5월호

깨달음의 구현자, 붓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 분

- 이필원 / 청호불교문화원 연구소장 -

왕자들의 청을 거절하고 기녀와의 약속을 지키다.

부처님 당시 사회는 철저한 계급질서인 카스트(Caste), 인도말로 와르나(Varna)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다. 사제계급인 바라문, 왕족인 끄샤뜨리야, 상공업이나 생산업에 종사했던 평민계급 와이샤, 그리고 노예계급인 수드라의 4계급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 계급제도가 사회시스템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달리 사성계급 (四姓階級)제도라고도 한다. 그런데 노예계급 보다 못한 불가촉천민도 있었는데, 이들은 계급질서 안에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계급제도는 창조신화와 결부되어 있었다. 즉 사성계급은 신이 창조한 존재이지만, 불가촉천민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니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부처님은 이러한 사회계급제도를 근본부터 부정하였다. 계급제도라는 것 자체가 인간들이 만든 사회시스템에 불과할 뿐, 본질적으로 인간을 계급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숫따니빠따』에 수록된 「와셋타의 경(Vasettha-sutta)」에서 이와 관련된 자세한 가르침이 전한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금기시하는 것을 비판하다가는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게 되는데, 하물며 고대사회에서 사회의 근본 시스템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page 부처님께 인사 올리는 암바빠리
(뉴델리 국립박물관, https://en.wikipedia.org/wiki/Amrapali)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암바빠리(Ambapālī)라고 하는 기녀가 있었다. 이 여인은 당시 상업도시로 유명했던 왓지국의 웨살리에 살고 있었다. 일설에는 그녀와 하룻 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한 나라의 하루 치 세금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해야 했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그녀는 모든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말일 것이다. 실제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마가다국의 왕 빔비사라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하였다. 결국 이들 사이에서 콘단냐라는 아들이 태어나게 된다. 훗날 암바빠리는 아들 콘단냐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자가 된다.

하지만 그녀의 출가는 부처님 열반 이후에 이루어졌다. 부처님의 열반의 여정을 그린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에서는 부처님과 암바빠리와의 만남을 전하고 있지만, 출가의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의 여정 중에 웨살리를 방문하시게 되고, 그곳에서 암바빠리가 소유한 망고나무 숲에 머무시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암바빠리는 부처님을 찾아 뵙고 설법을 들은 후, 다음 날 부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공양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page 부처님을 맞이하는 빔비사라왕
(https://en.wikipedia.org/wiki/Bimbisara)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웨살리의 귀족인 리차비족의 귀공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리차비들 역시 부처님을 만나 뵙고자 서둘러 길을 가던 중 이었다. 그러다가 암바빠리가 탄 마차와 가벼운 접촉이 있었고, 그들은 암바빠리에게 무슨 이유로 그렇게 서둘러 가는지를 묻게 되었다. 그리고 암바빠리가 부처님을 초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차비들은 암바빠리에게 원하는 만큼 재화를 줄터이니. 그 공양의 권리를 자신들에게 양도해 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암바빠리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해도 결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기회를 양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들은 리차비들은 비천한 여인에게 거절당했다고 생각하여 매우 기분이 상했다.

한편 그들은 자신들이 부처님을 찾아 뵙고 공양을 올리겠다고 청하면 한낱 기녀에 불과한 암바빠리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자신들의 청을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부처님을 찾아 뵙고 설법을 들은 뒤, 다음 날 공양을 올리겠다고 하자 부처님은 이미 암바빠리와의 약속이 되어 있다고 말씀하시고, 정중히 그들이 청을 거절하셨다.

리차비족은 당시 북인도 일대에서 가장 명망있는 귀족이자 왕족들이었다. 훗날 굽타왕조를 연 찬드라굽타 1세가 마가다 지역에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리차비족의 공주와 결혼한 예가 있듯이, 리차비족들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던 귀족이었다. 그런 그들의 청을 부처님은 기녀 암바빠리와의 선약을 이유로 거절하신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말하자면 오늘날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연예인과 다음 날 점심 약속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대통령이 같은 날 점심을 하자고 청했을 때 선약을 이유로 대통령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 선약을 했던 연예인에게 연락을 취해 양해를 구하지 않을까?

우리들은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보고,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태도를 정한다. 이것이 일반인들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가 좋다, 나쁘다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이것은 사회적 통념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에게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 관념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따르는 삶의 태도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물어보라고 하신다. 부처님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부처님은 당시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던 계급제도를 비판하면서 사람은 태생으로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셨다. 말하자면 그 사람이 왕족이라고 해도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고 옳지 못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탄압한다면 그는 강도이지 왕족이라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행동이 강도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깨달음의 길로 안내할 수 있을지 만을 생각하신 분이다. 귀천은 물론 남녀노소라는 차별적 인식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 그리고 이익인 깨달음의 길을 설하신 분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기녀, 왕족, 귀족이란 구분을 통해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처님은 언제나 시대를 이끌어가는 시대정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다. 그런만큼 불제자인 우리들 역시 그러한 부처님의 정신을 잘 배우고 익혀, 현실의 삶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자본이라는 새로운 계급질서가 사람들을 구분짓는 이 시대에, 불교는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