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5월호

성보순례 3

법주사 쌍사자 석등

- 이기선 / 청호불교문화원 도서관장 -

등은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지혜를 상징

page 남원 실상사 석등(고복형)

등은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지혜를 상징

등(燈)이란 어두운 곳을 밝히기 위하여 불을 켜는 데 필요한 도구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시대에는 등을 만드는 재료나 형태 또는 쓰임새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으로 일컫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등잔(燈盞)이다. 기름을 용기에 담고 실을 꼬아 만든 심지를 이용하여 불을 밝힌다. 그릇의 재료에 따라 토기, 도기, 자기, 옥석(玉石) 등이 있으며, 형태에 따라 종지형, 호형(壺形), 탕기형(湯器形)으로 나눌 수 있다. 기름은 식물성 기름(참기름·콩기름·면실유·피마자기름 등)과 어유(魚油), 경유(鯨油), 굳기름 등을 사용한다. 등경(燈檠)이 있으니, 이는 등잔을 적당한 높이에 얹도록 한 등대(燈臺)로서 흔히 등경걸이라 부른다. 등잔과는 별도로 만드나 등잔에 긴 대를 붙여 만든 것도 등경이라 한다. 다음으로 촛대가 있다.

초를 꽂아 불을 밝히는 등기(燈器)로 기본형식은 받침대와 간주(竿柱) 그리고 초꽂이가 달린 받침으로 이루어진다. 이 촛대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것과 제례나 혼례 또는 연회 등 의식에 쓰이는 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의식에서는 대개 쌍으로 사용하며, 대형 촛대는 2미터가 넘는 것도 있다. 또 제등(提燈)이란 밤길을 가거나 의식에서 사용하는 휴대용 등기(燈器). 초롱·등롱·청사초롱·조족등(照足燈)·조촉(照燭) 등이 있다. 괘등(掛燈)은 벽이나 들보에 거는 데 주로 외등(外燈) 양식으로 제등과 비슷한 형태나 구조를 지녔으나 크기가 큰 것이 특징이다. 한편 사찰에서 불전의 앞에 세우는 돌로 된 등을 광명대(光明臺)라 한다. 한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무덤 앞에 세운석 등을 장명등(長明燈)이라 한다.

이러한 여러 등 가운데 형태미나 상징성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불전(佛殿) 앞에 놓여 있는 석등을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석등이란 글자 뜻 그대로 돌로 만든 등을 일컫는 말이다. ‘석등’이란 명칭은 891년(신라 진성여왕 5)에 건립된 개선사지석등(開仙寺址石燈, 보물 제111호)에 새겨진 ‘건립석등(建立石燈)’이란 명기(銘記)에서 볼 수 있는데,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가장 앞선 자료이다. 이밖에도 1093년(고려 선종 10년)에 건조된 나주서문석등(羅州西門石燈, 보물 제364호)에 새겨진 명문에는 ‘등감일좌석조(燈龕一座石造)’란 표현이 보인다.

page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석등(현재 국립중앙박물관)

한편 「속리산법주사사적(俗離山法住寺事蹟)」의 기록을 보면 ‘연등각 석사자 광명대 일좌 동철 광명대 일좌(燃燈閣石獅子光明臺一座銅鐵光明臺一座)’란 구절이 있다. 오늘날에도 ‘석조쌍사자석등’(石造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이 법주사에 남아있어 위 기록에 보이는 ‘석사자광명대일좌’가 바로 그것임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연등각, 석사자광명대, 동철광명대란 기록에 의하여 법주사에는 돌과 쇠로 된 등기(燈器)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석등이라 일컫고 있지만 당시에는 광명대라고 이름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연등각이 광명대를 봉안한 전각의 이름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연등각이라는 특수한 전각을 따로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광명대란 이름은 조선시대 다른 사찰 기록에서도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석등이란 말이 이미 9세기 말의 금석문에 나타나고 있지만 불가에서는 비록 후대의 기록이나 그 종교적 상징기능에 따라 광명대(光明臺)란 용어를 널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재료에 의하여 이름 붙인 석등보다는 그 종교적 상징기능에 더 의미를 부여한 광명대란 용어가 보다 적절한 용어라 생각된다. 조선시대 무덤 앞에 놓인 석등을 일러 장명등(長明燈)이라 함도 단지 재료에 의한 명칭이 아니라 그 쓰임새에 의한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 명칭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을 밝히는 등기임에는 다름이 없지만 그 사용처나 쓰임새 그리고 상징기능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러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현존하는 유물의 명칭을 학술적으로 이름지을 때는 고유한 용어나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용어를 찾아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 생각된다.

“원래 燈이란 것은 어둠을 밝게 하여 주는 것이므로 불교에서는 지혜에 비유하여 佛前에 燈을 켜 바치는 燈供養을 香供養과 아울러 매우 중요시하여 온 것인데, 燈은 梵語로 ‘dipa’란 말이다. 이것이 ‘dipta’로 되면 「빛나는」이라는 형용사가 된다. 여하간 불교의식 때에는 燈을 켜고 자기의 心을 밝게 빛나게 바르게 하는 동시에 佛德을 찬양하고 나아가서는 圓滿大覺하시며 大慈大悲하신 佛을 더욱더욱 즐겁게 하여 드리는 心行을 가지라는 것을 굳게 하는 것이다.…「佛說施燈功德經」에는 佛法僧을 信하여 약간의 燈을 바치어도 그것으로 받는 惠福은 無窮無窮하고 佛滅後에 燈을 塔寺에 밝히면 現世에서는 三種의 청정한 心을 얻을 것이요, 來에서는 三十三天에 태어날 것이라 한다.…이렇게 燈을 밝힌다는 것이 燃燈이요, 燃燈된 것을 보며 心을 밝게 하는 것이 곧 看燈, 觀燈이다. 더욱이 過去世에 있어서 燃燈佛이 釋迦의 成佛을 授記하였다는 것 또는 「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의 十願 가운데 ‘廣修供養’에 ‘一一燈炷如須彌山 一一燈油如大海水’라고 있는것이라든지 이밖에도 燃燈에 관한 것이 경전에 많이 보이거니와 이와 같이 燃燈이라는 것은 불교에서 중요시되어 왔던 것인 바, 이러한 燃燈儀禮는 다시금 轉化하여 法會化 되었으니, 이것이 燃燈會·觀燈會이다.” <安啓賢, 「燃燈會攷」·「백성욱박사화갑기념불교학논문집」, 1959. p.504~5>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석등은 기본 형식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니, 대좌부, 화사부, 상륜부가 그것이다. 이중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과 빗물이 들어가 못하도록 덮은 지붕 모양의 덮개돌〔屋蓋石을 이루는 화사부이다. 다음은 이 화사부를 받치고 있는 이른바 대좌부로서 화사석을 바로 받치는 윗돌과 지표면에 놓인 지대석(地臺石)과 바로 그위에 얹어놓은 아랫돌, 그리고 윗돌과 아랫돌을 이어주는 간주석(竿柱石)으로 구성된다. 세 번째 부분은 상륜부(相輪部)로서 지붕돌 위에 얹어 보주(寶珠)나 보륜(寶輪) 등의 장식성이 풍부한 상륜(相輪)으로 이루어진 부분이다. 이 기본형식에서 변화가 많은 부분이 대좌부이며 특히 간주석이다.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팔각기둥의 형식이다. 그 다음은 전통악기인 장구을 닮았다고 해서 고복형(鼓腹形)이라고 불리는 형식이 있다. 드물게 사자 두 마리가 마주 보면 서서 뒷발로는 아랫돌을 딛고 앞발로는 윗돌을 포함한 화사부를 받들고 있는 형식도 있는데 이러한 형식을 갖춘 석등을 일러 쌍자사석등이라 한다. 그런데 쌍사자석등 가운데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처럼 사자가 서 있는 형태가 아니고 엎드린 사자 등 위에 화사석을 얹은 것도 있다. 한편 화사석의 형태도 다양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대부분 정8각형이나 때때로 부등변 6각형이나 사각형의 형식도 눈에 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報恩法住寺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

page 속리산 법주사 쌍사자석등

법주사 쌍사자 석등(報恩法住寺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

이 석등은 속리산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 특히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하대석〕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예스러운 멋을 풍기며, 현재 남아있는 사자 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형으로 높직하다.

여덟 면 중 어긋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 나오게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석등을 세운 시기는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통일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과 함께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page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일반형인팔각간주)

일찌기 부처님께서는 ‘자기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自燈明法燈明)’고 가르치셨다. 또한 「달마대사관심론(達磨大師觀心論)」을 보면 이런 가르침이 있다.

“해탈을 구하려는 자는 항상 몸을 등대로, 마음을 등잔으로, 신심을 심지로, 계향으로 기름을, 지혜로써 밝은 등불을 삼을 것이니, 항상 이와 같은 깨달음의 등불을 비추어 일체의 무명을 깨뜨려야 하느니라. (一切求解脫者 常以身位燈臺 以心爲燈盞 以信爲燈炷 以戒香爲燈油 以智慧明達爲燈光 常然如是覺燈 炤破一切無明痴暗)”

어디 그 뿐인가. 작은 등불에 얽힌 인연설화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아사세왕수결경(阿闍世王授決經)》에 실려 있는 「가난한 여인의 등불〔貧女一燈, 또는 貧者一燈〕」이란 이야기.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한 줄기 밝은 빛이다.